Trip to Turkey - Harem and Orientalism
Harem and Orientalism
1. 하렘과 오리엔탈리즘
'Fig-1'은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6대주를 상징하는 여섯개의 여인상입니다. 크기와 양식이 같기 때문에 한 개의 여인상이 나머지 여인상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습니다. 상징, 즉 표현의 차이에 앞서 먼저 주목해야할 점은 이 여섯개의 동상이 1878년 파리 엑스포 때 전시하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엑스포는 올림픽처럼 국제적인 체제와 규모를 갖춰 전 세계의 국가가 직접 참여하는 문화박람회로 그 파급력은 절대 작지 않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행사에 'Fig-1'의 6대주를 대표하는 동상이 전시되었다는 것은 매우 큰 상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림을 몇 점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 루브르 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그림들입니다.
'Fig-2'의 유화는 루브르에 전시된 '프랑수아 부셰'의 '오달리스크' 라는 작품입니다. 그림 속의 풍만한 여인은 엎드린 자세로 하체를 다 드러낸채 도자기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파란 색의 비단과 낮은 탁자와 도자기 그리고 책처럼 보이는 오른편의 상징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는지요?
'Fig-3'의 유화 역시 루브르에 전시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 라는 작품입니다. 이번에는 나체의 여인이 뒤를 돌아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고 '부셰'의 '오달리스크' 처럼 파란색 비단과 화려한 장신구, 손에는 이국적인 부채를 들고있고 머리에 터빈처럼 보이는 것을 두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이라는 그림 하나를 더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보여드린 오르세 미술관의 6대주 여인상과 세 편의 그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인상과 18~19세기에 그려진 세 점의 유화는 지금까지 배워왔던 서유럽 중심의 세계 사관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깨닫고 있지 못하는 역사의 한 단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인상부터 자세히 설명하자면 단 한명의 여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반신 (가슴)을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세아니아'를 상징하는 여인은 상반신 뿐만 아니라 하반신까지 거의 헐거벗은 모습입니다. 겨우 오른쪽 무릎과 허벅지만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에 반해 유럽을 상징하는 여인을 보시기 바랍니다. 전쟁의 신 '아테네'가 떠오를 정도로 호화로운 무장과 단정한 옷 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프랑수아 부셰'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그린 '오달리스크' 와 같은 여성 누드화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쉽게 그릴수 있는 그림이 아닙니다. 귀족이나 왕족 같은 상류 계급을 대상으로 누드를 그리는 것은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지만, 퇴폐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오달리스크'의 벗은 몸을 그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신고전주의 화가들은 여성 누드화를 그리는데 '오달리스크'를 많이 활용합니다. 그럼 도대체 '오달리스크' 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달리스크 (odalık)는 터키어로 술탄의 궁전에 있던 하렘의 여인을 뜻하는 말로 오스만 제국에서 술탄과 결혼할 자격이 주어진 미와 재능을 겸비한 정숙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적 고증도 없이 아랍의 문화는 상당히 '관능적'이고, 더 나아가 '퇴폐적'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하던 서양의 오만에 하렘은 쾌락적 공간이 되었고, 하렘의 여성에게는 오직 성적인 의미만이 부여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예가 'Fig-4'의 '사르다나팔루스 (Mort de Sardanapale)의 죽음' 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외젠 들라크루아가 영국의 시인 바이런 (Baron Byron)이 쓴 시극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 에 감동하여 그린 그림으로 사르다나팔루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벌거벗은 육감적인 몸매의 여인들이 잔혹하게 살해되는 장면이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반란군과의 싸움 끝에 성이 점령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자 사르다나팔루스는 부하들에게 화장 장작단을 쌓게 하고 자신의 온갖 재물과 여인들, 말과 개, 신하들을 화장단 위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리고는 처참한 살육의 향연을 벌인 뒤 불을 질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이 소림 끼치는 현장을 들라크루아는 충돌하는 색채와 활처럼 꺽이거나 뒤틀린 여인들의 몸뚱어리, 흥분해서 날뛰는 말과 같은 격렬한 몸부림으로 표현했고 온갖 화려함을 자랑하는 사방의 패물들과 그 위로 이 모든 상황을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는 사르다나팔루스 등 가히 극단적힌 가학과 피학을 뒤범벅시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그림 속 장면 자체가 실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며, 동방 (특히 이슬람)에 대한 선입관이나 인상 때문에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내부 반란으로 제국의 멸망이 다가오는 순간에 살육 축제를 벌이는 괴기스러운 장면은 미개하고 잔혹한 동양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또한 그림 속의 여성들은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있는 순간임에도 마치 교태를 부리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묘사하여 서양 미술에서 동양은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관능적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로서 서양은 합리성과 이성을 대표한다면, 동양은 비합리성과 감각적인 관능으로 뒤덮인 세계라는 이미지가 널리 퍼지게 됩니다.
미술 작품은 화가 개인의 생각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집단적 사고 방식을 표현하는 또다른 창입니다. 이러한 서양의 오만은 유럽의 문화와 예술에서 나타난 동양적인 경향이라는 뜻의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이 되었고 우리 자신 또한 이슬람에 대한 많은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내 눈을 가리고 있는 모든 거짓을 걷어내고 올바른 시각과 균형잡힌 역사관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내뱉고 많은 책들에서 사용되는 '대영 박물관' 이라는 용어를 생각해봅시다. '대영 박물관'이 아닙니다. 그냥 '영국 박물관'입니다. 분명 영어로는 'British Museum'인데 왜 이게 '대영 박물관'으로 번역이 됩니까? 2019년 연말, 중국에서 시작된 COVID-19로 인해 현재 전 세계 동양인들은 각종 인종 차별과 모욕, 폭행을 당하고 있고 이런 일들을 묵인하고 방치하고 있는 독일, 호주, 영국 등의 서유럽 국가들은 동양에 대한 사고 방식이 아직도 변하지 않은듯 합니다. 특히, 2차 세계 대전 때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한 전범 국가인 독일은 그동안 과거사에 대해 수없이 많이 반성하는 장면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런 인종 차별을 수수 방관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과거사를 진정으로 반성 하고 있는지, 그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2020년의 4월입니다.
2.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
미국의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1978년에 쓴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18세기 이후 서구의 다양한 문학 작품 속에 이슬람 세계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럼 지금과 같은 이슬람의 이미지, 하렘의 이미지 즉 오리엔탈리즘을 탄생시킨 역사 왜곡은 언제, 누가 시작한 것일까요?
3. 중세 유럽 신학 : 꾸란의 왜곡된 해석
중세 유럽에서 이슬람의 종교인 꾸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던 시기는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12세기부터입니다. 당시 유럽의 군주 및 신학자들이 꾸란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정복한 이슬람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의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고, 신학자의 경우 이슬람이라는 종교와의 정신적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두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슬람 교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는 것이 급선무였고,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 클뤼니 수도원장이었던 '페트루스'가 꾸란의 번역 작업을 주도했고 드디어 1147년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최초의 꾸란 라틴어 번역본이 출간됩니다.
이제 중세 신학자들은 이슬람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번역 출간된 꾸란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이 성윤리에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4세기 무렵 교부 철학을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욕을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한 원죄의 산물이자 타락의 근본 원인으로 규정하고 동정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을 정도로 성욕의 억제를 미덕으로 여겨왔던 반면, 이슬람에서는 성욕이란 억제할 수도 없고 억제되어서도 안되는 인간의 본원적인 욕구로 정의합니다. 이슬람의 교리는 성직자에게 독신 생활을 강요하지도 않을 뿐더라 오히려 결혼하는 것이 무슬림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꾸란에는 한 명의 남자가 최대 네 명의 부인까지 두는 것을 허용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본 유럽의 신학자들은 무슬림을 성욕이 억제되지 않는 야만스러운 족속으로 생각하고 꾸란의 천국과 관련된 구절을 읽고 이슬람에서 말하는 천국은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향긋한 포도주를 마시고 아름다운 여인과 놀며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또한 13세기 스페인에서 활약했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 '니콜두스'는 '사라센의 법에 대한 논박' 이라는 책에서 꾸란이 천국에서의 삶을 육체적 쾌락에 비유하여 언급한 것을 예로 들며, "꾸란은 외설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고 심지어 동성애까지 권고하는 비도덕적인 저서" (도대체 어디에?) 라고 비난합니다. 동시대의 또 다른 도미니크 수도사였던 '마르티'는 '무함마드 교파에 대하여' 라는 책에서 이슬람은 일부다처제, 축접제도, 동성애 등을 묵인하는 타락하는 종료라고 언급합니다.
13세기 스콜라 철학을 정립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 이교도 대전' 이라는 본인의 책에서 "무함마드는 육체적 쾌락을 미끼로 사람들을 욕정이 유혹하는 길로 내몰았다" 라고 언급하며 예언자 무함마드는 방탕한 호색가에 불과하기 때문에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4. 천일야화의 오번역, 거짓의 추가
천일야화.
아라비안 나이트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천일야화 (كتاب ألف ليلة وليلة) 는 중동의 구전 문학을 정리한 책으로 무려 280편이나 되는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18세기 초 프랑스 출신의 번역가 '앙투안 갈랑'에 의해 처음 번역되어 출간된 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러시아 등에서 번역되면서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습니다. 그러나 아라비안 나이트는 유럽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아랍어 원전에는 있지도 않은 엉뚱한 이야기가 새롭게 덧붙여지는 것이 예사였고 일부 번역가는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녀 간의 성애에 관한 이야기를 원작보다 훨씬 과장하여 애로틱하게 옮겨 놓았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명한 판본은 앞서 언급한 1704년 '앙투안 갈랑'의 번역본과 1885년 영국 탐험가 '리처드 버턴'이 출간한 책인데 두 판본을 비교시 버턴의 책이 훨씬 더 외설적입니다.
18세기와 19세기 유럽인들은 아라비아 나이트에 등장하는 화려하고 매력적인 하렘의 이야기와 그곳에 사는 벌거벗은 여인들 그리고 그들이 펼치는 관능적인 에로스 이야기에 열광했으며, 이로 인해 실제와 허구를 혼돈하게 만드는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오게 됩니다. '하렘'은 아랍어인 '하림 (حريم)' 에서 유래된 말로 '신성한 것'과 '불가침적인 것' 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렘은 너무 신성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함부로 외부에 보여줄 수 없는 장소를 의미하며 하렘에 사는 여성은 주로 술탄의 어머니, 아내, 딸, 하녀 등으로 외간 남자의 출입이 철저히 금지되는 곳 입니다.
5. 19세기 유럽 회화의 오리엔탈리즘
19세기 유럽 문화계는 오리엔탈리즘 회화를 주도했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존 프레데릭 루이스', '장 레옹 제롬' 등과 같은 미술가들에 의해 하렘의 이미지가 '신성하고 불가침적인 장소'가 아닌 욕정으로 충만한 일탈의 장소로 탈바꿈 됩니다.
'Fig-11'은 존 프레데렉 루이스가 그린 '하렘' 이라는 작품인데 상반신이 반쯤 벗겨져 자신의 손으로 가리며 부끄러워하는 여성과 여성의 옷을 벗기며 음융한 웃음을 짓는 흑인 노예 그리고 그러한 여성을 질투와 멸시가 섞인 눈길로 바라보는 세 명의 여성을 하나의 화폭에 담아 관음증적 쾌락을 한껏 자극하고 있습니다.
또한 장 레옹 제롬은 1870년에 그린 '무어인의 목욕탕 (Moorish Bath)'과 '뱀 마술사 (The Snake Charmer)'를 통해 아라비안 나이트의 마술적 신비와 동성애의 환상이 현실 속에 진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6. 오리엔탈리즘과 동양의 올바른 역사 인식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이나 지배를 정당화하는 고정되고 왜곡된 인식과 태도 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서구의 국가들은 동양은 비합리적이고 열등하며 도덕적으로 타락되었지만, 서양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성숙한 국가라는 인식을 만들어오고 이를 기반으로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켜 왔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지금도 교육 (세계사를 비롯한 다양한 노출), 영화, 음악 등의 사회적 매체들을 타고 아주 오랫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내면화 시켜왔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이를 정당화하고 아무 꺼리김 없이 받아들인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동양은 서양에 비해 절대 열등하지 않고 그들이 허구상으로 고정시킨 것처럼 이슬람은 퇴폐적이지 않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 눈을 가리고 정신을 망가뜨려 어떤 것이 거짓이고 진실이 무엇인지 구분해 낼 수 있는 통찰을 기를수 있습니다. 동양의 문명은 서양에 비해 절대 열등한 적이 없습니다.
2) Niqab : 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proxy/AVvXsEgOWETW-0bMTgei6QXt8aAB5-n1kzkH0hZUuL_2TrFdcy6olT4Jw1F2411XWGTjH22E0dJDDxWky2K2PJDnbcxbcbLocadshahc8it9Dh-rwP0V_l85to41i3KkA6gLiaYHxn3U2wLYSYRmwAZ0qY3o83xomyQRIsCJ=
3)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이교도 대전 : https://newsimg.hankookilbo.com/2019/05/17/201905170148780420_12.jpg
4) 김정명의 이슬람 문명 기행 : <15>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성적 환상과 오리엔탈리즘
5) 명화산책 (이상욱) : 오리엔탈리즘의 비극 - 샤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이제 그림을 몇 점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 루브르 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그림들입니다.
<Fig-2_Odalisque_Francois Boucher, Rcoco_1749 : Louvre, Paris> |
'Fig-2'의 유화는 루브르에 전시된 '프랑수아 부셰'의 '오달리스크' 라는 작품입니다. 그림 속의 풍만한 여인은 엎드린 자세로 하체를 다 드러낸채 도자기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파란 색의 비단과 낮은 탁자와 도자기 그리고 책처럼 보이는 오른편의 상징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는지요?
<Fig-3_The Grand Odalisque_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Neoclassicism_1814 : Louvre, Paris> |
'Fig-3'의 유화 역시 루브르에 전시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 라는 작품입니다. 이번에는 나체의 여인이 뒤를 돌아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고 '부셰'의 '오달리스크' 처럼 파란색 비단과 화려한 장신구, 손에는 이국적인 부채를 들고있고 머리에 터빈처럼 보이는 것을 두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이라는 그림 하나를 더 보겠습니다.
<Fig-4_The Death of Sardanapalus_Eugène Delacroix_1844 : Louvre, Paris> |
지금까지 보여드린 오르세 미술관의 6대주 여인상과 세 편의 그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인상과 18~19세기에 그려진 세 점의 유화는 지금까지 배워왔던 서유럽 중심의 세계 사관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깨닫고 있지 못하는 역사의 한 단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인상부터 자세히 설명하자면 단 한명의 여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반신 (가슴)을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세아니아'를 상징하는 여인은 상반신 뿐만 아니라 하반신까지 거의 헐거벗은 모습입니다. 겨우 오른쪽 무릎과 허벅지만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에 반해 유럽을 상징하는 여인을 보시기 바랍니다. 전쟁의 신 '아테네'가 떠오를 정도로 호화로운 무장과 단정한 옷 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프랑수아 부셰'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그린 '오달리스크' 와 같은 여성 누드화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쉽게 그릴수 있는 그림이 아닙니다. 귀족이나 왕족 같은 상류 계급을 대상으로 누드를 그리는 것은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지만, 퇴폐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오달리스크'의 벗은 몸을 그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신고전주의 화가들은 여성 누드화를 그리는데 '오달리스크'를 많이 활용합니다. 그럼 도대체 '오달리스크' 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달리스크 (odalık)는 터키어로 술탄의 궁전에 있던 하렘의 여인을 뜻하는 말로 오스만 제국에서 술탄과 결혼할 자격이 주어진 미와 재능을 겸비한 정숙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적 고증도 없이 아랍의 문화는 상당히 '관능적'이고, 더 나아가 '퇴폐적'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하던 서양의 오만에 하렘은 쾌락적 공간이 되었고, 하렘의 여성에게는 오직 성적인 의미만이 부여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예가 'Fig-4'의 '사르다나팔루스 (Mort de Sardanapale)의 죽음' 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외젠 들라크루아가 영국의 시인 바이런 (Baron Byron)이 쓴 시극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 에 감동하여 그린 그림으로 사르다나팔루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벌거벗은 육감적인 몸매의 여인들이 잔혹하게 살해되는 장면이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반란군과의 싸움 끝에 성이 점령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자 사르다나팔루스는 부하들에게 화장 장작단을 쌓게 하고 자신의 온갖 재물과 여인들, 말과 개, 신하들을 화장단 위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리고는 처참한 살육의 향연을 벌인 뒤 불을 질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이 소림 끼치는 현장을 들라크루아는 충돌하는 색채와 활처럼 꺽이거나 뒤틀린 여인들의 몸뚱어리, 흥분해서 날뛰는 말과 같은 격렬한 몸부림으로 표현했고 온갖 화려함을 자랑하는 사방의 패물들과 그 위로 이 모든 상황을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는 사르다나팔루스 등 가히 극단적힌 가학과 피학을 뒤범벅시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그림 속 장면 자체가 실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며, 동방 (특히 이슬람)에 대한 선입관이나 인상 때문에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내부 반란으로 제국의 멸망이 다가오는 순간에 살육 축제를 벌이는 괴기스러운 장면은 미개하고 잔혹한 동양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또한 그림 속의 여성들은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있는 순간임에도 마치 교태를 부리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묘사하여 서양 미술에서 동양은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관능적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로서 서양은 합리성과 이성을 대표한다면, 동양은 비합리성과 감각적인 관능으로 뒤덮인 세계라는 이미지가 널리 퍼지게 됩니다.
미술 작품은 화가 개인의 생각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집단적 사고 방식을 표현하는 또다른 창입니다. 이러한 서양의 오만은 유럽의 문화와 예술에서 나타난 동양적인 경향이라는 뜻의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이 되었고 우리 자신 또한 이슬람에 대한 많은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내 눈을 가리고 있는 모든 거짓을 걷어내고 올바른 시각과 균형잡힌 역사관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내뱉고 많은 책들에서 사용되는 '대영 박물관' 이라는 용어를 생각해봅시다. '대영 박물관'이 아닙니다. 그냥 '영국 박물관'입니다. 분명 영어로는 'British Museum'인데 왜 이게 '대영 박물관'으로 번역이 됩니까? 2019년 연말, 중국에서 시작된 COVID-19로 인해 현재 전 세계 동양인들은 각종 인종 차별과 모욕, 폭행을 당하고 있고 이런 일들을 묵인하고 방치하고 있는 독일, 호주, 영국 등의 서유럽 국가들은 동양에 대한 사고 방식이 아직도 변하지 않은듯 합니다. 특히, 2차 세계 대전 때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한 전범 국가인 독일은 그동안 과거사에 대해 수없이 많이 반성하는 장면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런 인종 차별을 수수 방관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과거사를 진정으로 반성 하고 있는지, 그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2020년의 4월입니다.
2.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
<Fig-5_Edward Said> |
미국의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1978년에 쓴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18세기 이후 서구의 다양한 문학 작품 속에 이슬람 세계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사이드의 주장에 따르면 "서구는 자신이 상상해서 만든 허구적 이미지를 통해 현실의 이슬람 세계를 마음대로 표상화 했고, 나중에는 허구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현실의 모습을 지우고 오히려 진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허구적 이미지는 시대에 뒤떨어진 이슬람 세계를 문명화해야 한다는 유럽의 식민주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기본 이론이 되고,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사이드는 "오리엔트는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오리엔트화 되었다" 라는 말을 남깁니다.현대의 이슬람 지역은 전 세계 어느곳보다 보수적인 윤리적 규범이 적용되는 곳으로 아직도 여성이 외출할 때마다 'Fig-6'의 '부르카' 혹은 'Fig-7'의 '니캅'을 착용하여 온 몸을 가려야 합니다.
<Fig-6_Burqa : Ref-1>
또한 남녀의 공간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서유럽에서는 로마 시대부터 만연하여 (미소년 동성애) 중세 유럽, 르네상스시기까지 교회법으로는 금지되어 있을 망정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과 달리 이슬람에서는 박해의 대상이 됩니다.
|
<Fig-7_Niqab : Ref-2> |
그럼 지금과 같은 이슬람의 이미지, 하렘의 이미지 즉 오리엔탈리즘을 탄생시킨 역사 왜곡은 언제, 누가 시작한 것일까요?
3. 중세 유럽 신학 : 꾸란의 왜곡된 해석
중세 유럽에서 이슬람의 종교인 꾸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던 시기는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12세기부터입니다. 당시 유럽의 군주 및 신학자들이 꾸란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정복한 이슬람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의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고, 신학자의 경우 이슬람이라는 종교와의 정신적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두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슬람 교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는 것이 급선무였고,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 클뤼니 수도원장이었던 '페트루스'가 꾸란의 번역 작업을 주도했고 드디어 1147년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최초의 꾸란 라틴어 번역본이 출간됩니다.
이제 중세 신학자들은 이슬람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번역 출간된 꾸란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이 성윤리에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4세기 무렵 교부 철학을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욕을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한 원죄의 산물이자 타락의 근본 원인으로 규정하고 동정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을 정도로 성욕의 억제를 미덕으로 여겨왔던 반면, 이슬람에서는 성욕이란 억제할 수도 없고 억제되어서도 안되는 인간의 본원적인 욕구로 정의합니다. 이슬람의 교리는 성직자에게 독신 생활을 강요하지도 않을 뿐더라 오히려 결혼하는 것이 무슬림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꾸란에는 한 명의 남자가 최대 네 명의 부인까지 두는 것을 허용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본 유럽의 신학자들은 무슬림을 성욕이 억제되지 않는 야만스러운 족속으로 생각하고 꾸란의 천국과 관련된 구절을 읽고 이슬람에서 말하는 천국은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향긋한 포도주를 마시고 아름다운 여인과 놀며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سيحضر الله للذين يطلبون الإيمان ويعملون الصالحات ، فليعيشوا إلى الأبد في النهر.""هناك زوجة نقية. (Qur'an 4:57)"
"알라는 믿음을 찾고 선행을 하는 자를 천국에 들게 하리니 강이 흐르는 그 곳에서 영생케 하라. 그곳에는 순결한 아내가 있노라"중세 유럽의 신학자들은 이 같은 구절을 보고 이슬람을 영적인 가치보다 오히려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종교로 단정지어 버립니다. 도대체 어떻게 꾸란 4장 57절의 구절에서 중세 유럽의 신학자들이 단정지은 결론을 유추할 수 있습니까?
<Fig-8_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이교도 대전 : Ref-3> |
또한 13세기 스페인에서 활약했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 '니콜두스'는 '사라센의 법에 대한 논박' 이라는 책에서 꾸란이 천국에서의 삶을 육체적 쾌락에 비유하여 언급한 것을 예로 들며, "꾸란은 외설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고 심지어 동성애까지 권고하는 비도덕적인 저서" (도대체 어디에?) 라고 비난합니다. 동시대의 또 다른 도미니크 수도사였던 '마르티'는 '무함마드 교파에 대하여' 라는 책에서 이슬람은 일부다처제, 축접제도, 동성애 등을 묵인하는 타락하는 종료라고 언급합니다.
13세기 스콜라 철학을 정립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 이교도 대전' 이라는 본인의 책에서 "무함마드는 육체적 쾌락을 미끼로 사람들을 욕정이 유혹하는 길로 내몰았다" 라고 언급하며 예언자 무함마드는 방탕한 호색가에 불과하기 때문에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Fig-9_Antoine Galland> |
아라비안 나이트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천일야화 (كتاب ألف ليلة وليلة) 는 중동의 구전 문학을 정리한 책으로 무려 280편이나 되는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18세기 초 프랑스 출신의 번역가 '앙투안 갈랑'에 의해 처음 번역되어 출간된 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러시아 등에서 번역되면서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습니다. 그러나 아라비안 나이트는 유럽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아랍어 원전에는 있지도 않은 엉뚱한 이야기가 새롭게 덧붙여지는 것이 예사였고 일부 번역가는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녀 간의 성애에 관한 이야기를 원작보다 훨씬 과장하여 애로틱하게 옮겨 놓았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명한 판본은 앞서 언급한 1704년 '앙투안 갈랑'의 번역본과 1885년 영국 탐험가 '리처드 버턴'이 출간한 책인데 두 판본을 비교시 버턴의 책이 훨씬 더 외설적입니다.
<Fig-10_Richard Francis Burton> |
5. 19세기 유럽 회화의 오리엔탈리즘
19세기 유럽 문화계는 오리엔탈리즘 회화를 주도했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존 프레데릭 루이스', '장 레옹 제롬' 등과 같은 미술가들에 의해 하렘의 이미지가 '신성하고 불가침적인 장소'가 아닌 욕정으로 충만한 일탈의 장소로 탈바꿈 됩니다.
<Fig-11_The Harem : John Frederick Lewis> |
'Fig-11'은 존 프레데렉 루이스가 그린 '하렘' 이라는 작품인데 상반신이 반쯤 벗겨져 자신의 손으로 가리며 부끄러워하는 여성과 여성의 옷을 벗기며 음융한 웃음을 짓는 흑인 노예 그리고 그러한 여성을 질투와 멸시가 섞인 눈길로 바라보는 세 명의 여성을 하나의 화폭에 담아 관음증적 쾌락을 한껏 자극하고 있습니다.
<Fig-12_Moorish Bath : Jean Leon Gerome> |
<Fig-13_The Snake Charmer : Jean Leon Gerome> |
또한 장 레옹 제롬은 1870년에 그린 '무어인의 목욕탕 (Moorish Bath)'과 '뱀 마술사 (The Snake Charmer)'를 통해 아라비안 나이트의 마술적 신비와 동성애의 환상이 현실 속에 진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6. 오리엔탈리즘과 동양의 올바른 역사 인식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이나 지배를 정당화하는 고정되고 왜곡된 인식과 태도 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서구의 국가들은 동양은 비합리적이고 열등하며 도덕적으로 타락되었지만, 서양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성숙한 국가라는 인식을 만들어오고 이를 기반으로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켜 왔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지금도 교육 (세계사를 비롯한 다양한 노출), 영화, 음악 등의 사회적 매체들을 타고 아주 오랫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내면화 시켜왔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이를 정당화하고 아무 꺼리김 없이 받아들인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동양은 서양에 비해 절대 열등하지 않고 그들이 허구상으로 고정시킨 것처럼 이슬람은 퇴폐적이지 않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 눈을 가리고 정신을 망가뜨려 어떤 것이 거짓이고 진실이 무엇인지 구분해 낼 수 있는 통찰을 기를수 있습니다. 동양의 문명은 서양에 비해 절대 열등한 적이 없습니다.
<Fig-14_Orientalism : Edward W. Said> |
<Episode Complete>
6. Reference
1) Burqa : https://www.google.com/url?sa=i&url=http%3A%2F%2Fblog.naver.com%2FPostView.nhn%3FblogId%3Dyoujin1387%26logNo%3D221138022040%26categoryNo%3D0%26parentCategoryNo%3D22&psig=AOvVaw0XgiCrejYihHKVi53E75Vn&ust=1588398130108000&source=images&cd=vfe&ved=0CAIQjRxqFwoTCIC476b6kekCFQAAAAAdAAAAABAI2) Niqab : 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proxy/AVvXsEgOWETW-0bMTgei6QXt8aAB5-n1kzkH0hZUuL_2TrFdcy6olT4Jw1F2411XWGTjH22E0dJDDxWky2K2PJDnbcxbcbLocadshahc8it9Dh-rwP0V_l85to41i3KkA6gLiaYHxn3U2wLYSYRmwAZ0qY3o83xomyQRIsCJ=
3)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이교도 대전 : https://newsimg.hankookilbo.com/2019/05/17/201905170148780420_12.jpg
4) 김정명의 이슬람 문명 기행 : <15>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성적 환상과 오리엔탈리즘
5) 명화산책 (이상욱) : 오리엔탈리즘의 비극 - 샤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