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p to Turkey - Dolmabahce Palace : Background

Dolmabahce Palace : Background

<Fig-1_Sultan Abdulmecid : Ref-1>

1. Ottoman Sultan's Palace
동시대의 사료 부족과 남아있는 사료에도 사실과 허구가 혼재하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건국 연도를 특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나 아나톨리아 (소아시아) 서북부에서 오스만 1세가 왕위에 오른 1299년을 건국 연도로 보는 것이 역사적 통례입니다. 1922년에 술탄 제가 폐지되며 메흐메트 (VI. Mehmet) 6세가 폐위되기까지 625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수도는 "부르사 (Bursa)"를 시작으로 "에디르네 (Edirne)"를 거쳐 "이스탄불 (Istanbul)"이 제국의 마지막 수도가 됩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제국의 수도가 변경되며 그에 맞게 술탄의 황궁도 새로 건설되는데 현재 이스탄불에는 톱카프 궁전과 돌마바흐체 궁전이 남아 있습니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을 패망시킨 술탄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 후 동로마 제국이 사용했던 대부분의 궁전이 파괴된 것을 보고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 대학이 위치한 곳에 임시 거처로 목조 궁전을 건설하고 그 후 6년 뒤인 1459년, 마르마라해와 보스포루스 해협, 골든 혼을 모두 볼 수 있는 장소에 새로운 궁전을 건설할 것을 명령합니다.

<Fig-2_Istanbul University Beyazit Campus>

이때 건설된 새로운 궁전이 바로 톱카프 궁전입니다. 비록 목조 건물이었지만 이미 톱카프 궁전 이전에 황궁이 있었기 때문에 톱카프 궁전은 "새로운 궁전"이라는 의미의 "예니 사라이 (Yeri Saray)"로 불리다가 나중에 궁전 정문에 배치된 두 개의 대포 때문에 "대포 문 (Topkapi)"라는 이름의 톱카프 궁전 (Topkapi Saray)이 됩니다. 술탄 메메드 2세가 1467년 톱카프 궁전을 완공한 후 1843년 술탄 압뒬메지트 1세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해안을 메우고 돌마바흐체 궁전을 지을 때까지 400년의 시간 동안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황궁이었습니다. 

1614년 처음 건설된 돌마바흐체는 이름 그대로 술탄들을 위한 정원 중심의 작은 목재 궁전으로 대리석 건물의 호화스러움과 비교해 내관과 외관의 질적인 면에서 떨어지는 건축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주변에서 무한대로 구할 수 있었던 대리석에 비해 100% 수입에 의존했던 목재의 특성상 많은 건축비가 들어가는 고급 건축물이었습니다. 현재 돌마바흐체 궁전의 위치는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할 때 닻을 내린 지점으로 고대 그리스 신화로 유명한 "아르고 호 (Argonautika)" 또한 이 지역에 닻을 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잔티움 시대에는 비잔틴 궁전이 있었으며,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정복한 이후에도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모스크, 정자, 공공 분수 등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섰고 돌마바흐체 궁전이 건설되기 전의 17세기까지 해군 함정의 고별식 (Traditional Farewell Ceremonies)이 열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1814년 술탄의 정원으로 사용되던 목재 궁전이 화재로 전소된 뒤, 31대 술탄인 "압뒬메지트 1세 (Sultan Abdulmecit, Fig-1)"때 아르메니아 건축가인 "가라벳 발얀"에 의해 1856년 대리석 외관의 궁전으로 재건축됩니다. "돌마바흐체 (Dolmabahce)"라는 이름은 채운다는 뜻의 "돌마 (Dolma)"와 정원이라는 뜻의 "바흐체 (Bahce)"가 합쳐진 "정원 가득"이라는 의미로 유럽 쪽 해안 습지를 메운 뒤 그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Fig-3_Dolmabahce Palace in an Old Postcard : Ref-1>

2. 19세기 중반의 건축 : 화려함의 극치
돌마바흐체 궁전은 총 면적 250,000 m2 (약 83,000평)로 건축 연면적은 14,600 m2 (약 4500평)이며 바닥에 난방 장치와 엘리베이터를 갖춘 2층 건물입니다. 궁전 안에는 285개의 방이 있는데 모두 다른 디자인으로 같은 방이 없고 회의나 의전을 수행하는 홀이 43개, 1427개의 창문과 6개의 발코니 (이 중 두 곳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출입이 가능함), 목욕탕을 갖추고 있습니다. 장식용 시계 또한 156개에 달하며 화병 280개, 장식용 촛대 58개로 치장되어 있고  바닥에 깔린 131개의 큰 카펫과 99개의 카펫은 모두 실크로 만들어진 수 공예품 입니다.

<Fig-4_View of the Crystal Staircase from the Ground Floor : Ref-1>

궁전 중앙 홀에는 750개의 크리스탈 촛대로 이루어진 무게 4.5 톤의 샹들리에가 천장 36m 높이에 매달려 있고 내부 치장에만 14톤의 금 (현 시세 7500억)과 40톤의 은 (현 시세 420억), 수제 페르시아 실크 카펫과 실크 커튼 등이 사용 되었습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건축 공사비만 대략 1조원 (평당 2300 만원)에 달하며 중앙 홀에서 발코니로 올라가는 계단 손잡이들은 모두가 크리스탈입니다.

1) 버킹엄 궁 (Buckingham Palace)과 베르사유 (Versailles)의 모방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 함대에 패한 이후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의 패권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스만 제국이 유럽 제국보다 열세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해전에서 패하긴 했으나 국력은 여전히 강대하여 패전한 지 반년만에 같은 규모의 함대를 재건하여 키프로스와 튀니스를 수복하고 1683년까지 슬로베니아와 아드리아 해 연안을 제외한 모든 발칸 반도 지역을 지배하게 됩니다. 문제는 18세기부터 입니다. 1699년 헝가리를 잃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절대 군주제로부터의 각 민족별 독립을 추구하는 세계적인 흐름에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많은 유럽 국가들이 영토를 수복하고 아랍인을 비롯한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 운동이 시작됩니다. 이 여파로 1830년에는 그리스가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08년에 즉위한 술탄 "마흐무트 2세"는 군대의 서구화를 위해 예니체리를 폐지하고 외무성과 내무성, 재무성을 신설하여 중앙 정부의 권력 강화를 추진합니다. 또한 1839년 압뒬메지트 1세는 행정에서부터 군사, 문화까지 서구적인 체제로의 전향을 도모하는 전면적인 개혁 칙령인 "탄지마트 (Tanzimat)"를 공포한 이후 전면적인 개혁 정치를 실행에 옮겨 중앙 집권적인 관료 기구와 근대적인 군대를 확립함으로써 서구형 국가로의 전환을 진행시켜 나갑니다. 1853년 러시아와 벌어진 크림 전쟁에서 영국의 가담으로 겨우 승리를 거둔 오스만 제국은 서구 유럽의 필요성을 절감한 뒤, 1856년 비 무슬림의 권리를 인정하는 칙령을 발표합니다. 이렇게 2단계에 들어간 "탄지마트 (Tanzimat)"는 종교법 (샤리아)과 서양 근대법의 절충을 목표로 새로운 법전 제정, 근대 교육을 위한 학교의 신설, 근대적 토지 사유 제도를 인정하는 토지법을 시행하는 등 추가적인 개혁을 진행해 나갑니다.

<Fig-5_The Grand Ceremonial Hall : Ref-1>

그러나 개혁과 전행을 수행하는 동안 서구 열강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받게 되고 이는 서구인들의 오스만 제국 내 무역 활동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와 오스만 제국은 경제면에서 서구 열강의 반 식민지 상태가 됩니다. 그 결과 제국의 재정은 서유럽의 경제와 제국 내 농산물 수확량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고 1875년 서구 금융 공황과 농산물의 흉작으로 결국 파산하게 됩니다. 돌마바흐체 궁전이 건설됐던 1850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상황은 유럽과 아시아를 지배했던 강한 군사력을 잃고 전쟁과 사치로 제국의 힘이 약화된 상황에서 건축비만 1조원에 달하고 내부 장식에 들어간 돈은 추산하기도 어려운 새로운 궁전을 건설함으로써 제국의 재정을 파국으로 몰고가 결국 파산하고 맙니다. 압뒬 메지트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여러가지 문제에 관해 주 정부 관리들과 회의를 가지며 아래와 같은 제국의 재정 상태를 언급하나 서구와 동등한 외교 및 의전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일로 여겨지게 되고 돌마바흐체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 시키게 됩니다.

"The conviction that an increase in income should mean an increase in outlays at a time when the Ottoman dominions are yielding no revenue is disastrous, it is the road to ruin. The palace is sumptuous, it could have been less elaborate. When faced with the protestations of a member of court, who said "But my lord this is but little for you.", the Sultan replied: "No. no. I also feel that this was extravagant."

돌마바흐체 궁전은 오스만 제국이 술탄의 왕실로 사용했던 톱카프 궁전의 국운을 되찾고자 새롭게 건축했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톱카프 궁전은 철저한 이슬람식 궁전으로 외관을 중시한 반면 돌마바흐체 궁전은 외부 모양은 영국의 버킹엄 궁전을 모방했고 내부 정원과 건물 안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궁전에 사용된 샹들리에, 카펫, 시계 등은 독일, 영국, 이집트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홍보했으나 제국의 힘이 쇠퇴할 대로 쇠퇴한 1850년대에 선물이 아닌 돈을 주고 구입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 들여지고 있습니다.

<Fig-6_The Yildiz Porcelain : Ref-1>

3. Palace Architecture

<Fig-7_The Main Structure of Dolmabahce>

돌마바흐체 궁전은 바로크와 로코코, 오스만 제국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 주요 구조로는 의전실 (Grand Ceremonial Hall)을 중심으로 한 "Imperial Mabeyn Chamber"와 "Imperial Harem"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요 세 부분의 세부 사항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궁전의 구조는 터키식 전통 주택의 평면 구조를 따랐으며, 각각 별개의 기능을 가진 3개의 구획이 하나의 지붕 아래 모여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터키식 전통 주택의 특색을 서양식 개념과 결합시켰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Fig-8_Traditional Turkish Palace Architecture>

4. The Palace Decoration

<Fig-9_A Significant Part of the Palace Art Collection hang on the Walls : Ref-1>

돌마바흐체 궁전의 외관과 내부 장식적 요소들은 서양의 다양한 예술적 시대의 모티브를 함께 결합한 것으로 18세기 중반부터 바로크와 로코코의 영향을 받은 모티브가 전통적인 오스만 예술에 반영되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모티브를 결합하는 개념을 그리스어의 "최고를 선택하다" 라는 뜻의 "에클렉티코스 (Eklektikos)"에서 기원한 "이클레틱 (Eclectic)"과 "이클레티시즘 (Eclecticism)"이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원래는 철학에서 쓰이던 용어이지만 건축사 혹은 미술사에서는 여러 시대에 걸쳐 나타난 다양한 장식적 요소들을 조합시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을 지칭합니다. 이러한 모티브는 실내 장식의 벽과 천장, 외관 장식에서도 활용된 것을 볼 수 있고 동물의 형상, 풍경 등 석고 주물판을 사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Fig-10_A Detail of the Ceiling Decoration of Glazed Pavilion : Ref-1>

<Fig-11_A Reflection of Light Emitted from the Crystals onto the Banisters of the Caliph Staircase : Ref-1>

5. Illumination and Heating
전기가 사용되기 전 돌마바흐체 궁전은 내부 조명으로 가스등을 사용했습니다. 조명에 사용될 가스를 공급하기 위해 궁전이 건립될 당시 현재 이스탄불 "BJK Inonu" 경기장 위치에 가스 저장소가 함께 설치 되었습니다. 이 가스 저장소는 1873년까지 왕실 재무부에서 관리하다가 프랑스 가스 회사로 운영권이 넘어갔으며 나중에는 이스탄불 시로 이관 되었으며, 저장소에서 궁전으로 가스를 옮기는 데 사용된 기구는 영국에서 조달되었습니다. 이후 가스로 작동되던 칸델라브라 (Candelabras)와 샹들리에는 전등으로 대체되게 됩니다.

<Fig-12_Today's BJK Inonu Stadium in Istanbul>

<Fig-13_Imperial Stables and the Gasometre of Dolmabahce : Ref-1>

돌마바흐체 궁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난방 시스템이 사용됐는데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벽난로였습니다. 일부 방과 홀은 화로와 타일 난로 (Tiled Stove)로 난방을 하였으나, 술탄 메흐메트 5세 (Mehmed V Resad) 때인 1910년에 중앙 난방이 설치됩니다. 의전실 (Grand Ceremonial Hall)은 지하에 있는 보일러 (Fig-14)로 공기를 가열한 뒤 기둥 받침대의 그릴을 통해 가열된 공기를 보내 실내 온도가 18~20 ℃ 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Fig-14_The Historical Central Heating Boilers : Ref-1>


<Episode Complete>


6. Reference
1) Dolmabahce Palace : TBMM Basimevi-Ankara, ISBN 975-6226-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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